새문안의역사

새문안교회 역사 이야기


1. 언더우드 목사(1859~1916)



1884년 7월28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목사를 초대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하여, 12월16일에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떠나 다음해 1월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잠시 머무르며 초대교인인 이수정(李樹廷)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말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가지고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에 26살 총각의 몸으로 그리고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인천 제물포(濟物浦)에 도착하였다. 이후 언더우드 목사는 새문안교회 목회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의 틀과 기독교문화 창달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고, 4대에 걸쳐 한국을 섬기는 선교사 가정으로 자리 잡았다.

언더우드 타자기
언더우드 목사가 사용한 여행가방


신학교 졸업당시의 언더우드 목사
신학교 졸업당시의 언더우드 목사

언더우드 목사
언더우드 목사

부인 릴리어스 홀튼 여사
부인 릴리어스 홀튼 여사

원한경 목사(언더우드 2세)
원한경 목사(언더우드 2세)

원일한 장로(언더우드 3세)
원일한 장로(언더우드 3세)

김규식 전별기념(1913년)
김규식 전별기념(1913년)

선교50주년희년기념예배(1934년, 설교자 언더우드선교사)
선교50주년희년기념예배(1934년, 설교자 언더우드선교사)


2. 언더우드 학당 (1886년 5월)



언더우드 목사가 1886년 봄 고종의 허락을 받아 영국의 고아학교 형태로 설립하였다. 당시 서울 인구는 성문 안에 14만명, 성문 밖에 12만명이 살고 있었으나 전염병과 갑신정변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이러한 참상을 목격한 언더우드 목사는 언더우드 학당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하나 둘 데려왔다. 처음에 한 명으로 시작한 언더우드 학당은 예수교학당(1890~1893), 민로아학당(1893~1897), 중학교(1901~1902), 예수교중학교(1902~1905), 경신학교(1905~1945), 경신중학교(1945~1950), 경신중고등학교(1950~1972), 경신중·고등학교(1972~현재)로 변모하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학문의 사학 요람지로서 우리 민족이 겪어 온 파란만장한 풍운의 민족사를 짊어지고 육영사업에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도산島山 안창호는 1894년 민로아학당에 찾아들어 1897년 폐당 할 때까지 3년간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민로아 학당장의 소질을 전수받아 미구未久에 조리있는 웅변과 문필 그리고 거국가, 애국가 등 많은 작사를 남겼다.


 언더우드의 고아원(1886년 모습, 아펜젤러 목사가 촬영)
언더우드의 고아원(1886년, 아펜젤러 목사가 촬영)


언더우드의 고아원 학교 학생들(1888년 모습)
언더우드의 고아원 학교 학생들(1888년 모습)


1901년 모습
예수교학당(1891)


 민로아학당(1893)
민로아학당(1893)


언더우드의 고아원(1901년 모습)
언더우드의 고아원(1901년 모습)


예수교중학교 (1903)
예수교중학교 (1903)


 죤디웰스기념당(1910)
죤디웰스기념당(1910)


경신고(현재)
경신고(현재)



3. 여성선교사업 (1886년)



새문안교회는 일찍부터 여성선교에 착수하였다.

1887년 6월, 언더우드학당에 새로 온 고아 중 여자아이(정네) 한명이 끼어 있었다. 그래서 언더우드 학당장은 제중원濟衆院 여의사 엘러즈A. J. Elers에게 부탁하여 여자아이 한 명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했다. 엘러즈가 감리교 선교사 벙커 D.A.Bunker 와 결혼하여 장로교를 떠난 후에는 홀튼Lillias Horton Underwood 그리고 헤이든 M. Hayden 이 학교 일을 맡아 보았다. 그 후 1890년 여선교사 도티가 내한하여 학교를 맡으면서 제대로 학교 형태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정동에서 시작된 이 학교가 1895년 연동으로 옮겨 오늘의 정신여학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여성 선교 사업은 헤론부인에 의해 추진되었다. 헤론부인은 자기 집에 여성들을 모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1888년 10월에는 여성 세례교인이 4명으로 보고되고 있다. 정동에서 여성사업을 주관했던 헤론부인은 1890년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계속남아 여성사업을 맡아 보았는데 1889년에는 이미 관내못골에 여성들만의 예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헤론부인의 관내못골 집회와 별도로 정동에서도 기포드 부인에 의한 여성집회가 역시 1889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두 곳의 여성집회는 1890년 봄에 합해져 기포드 부인 관장하에 정동 기포드 부인 집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1891년 보고에 의하면 평균 37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다.

여기에 1893년 말에 지금의 독립문 근처인 모화관에 진료소가 설립되고 이듬해 부터는 남성집회와 함께 여성집회가 매주일 오후에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1889년경에 시작된 여성 집회는 1895년말 서대문 안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기까지 계속되었다.


1887년 엘러즈의 정동여학당

1887년 엘러즈의 정동여학당
1887년 엘러즈의 정동여학당

정신여학교
정신여학교

1910년 정신여학교
1910년 정신여학교

모화관
모화관

정신여고(현재)
정신여고(현재)



4. 새문안교회 창립 (1887년 9월27일)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화요일) 저녁,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재하에 한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로서 탄생되었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영어 예배 집회만 있었으나, 이제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 말로 예배를 드리는 한국인 교회가 조직되게 된 것이다. 이날 밤 한국인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관으로 새문안교회가 서울 장안 정동에 위치한 한옥(韓屋)에서 창립 모임을 가졌다. 마침 이날 교회 창립 모임에는 서상륜을 파송했던 만주의 로스(John Ross, 羅約翰) 목사가 참석하였는데 그는 이날의 새문안교회 탄생의 역사적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약성서 일로 배를 타고 서울에 갔다. 배편은 유일한 수단이었고 편했다. 도착한 날 저녁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저녁이었다. 나를 안내한 언더우드 씨는 그날 저녁에 작은 무리로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작은 예배당에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의 친절한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나는 그와, 그의 학교 학생과 동행했다. 이미 어둠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넓은 길을 가로질러 갔는데 동양의 대부분 도시들처럼 불이 없어 어두웠다. 조그만 등을 든 한국인의 안내를 받아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작고 빈 안뜰로 들어섰다. 우리가 대문을 두드리자 그 문이 열렸다. 종이를 바른 방문을 조심스럽게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옷을 정제하고 학식 있어 보이는 남자 14명이 거기에 있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그날 밤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의 제일 중요한 일은 두 사람을 장로로 선출하는 일이었다. 이의 없이 두 사람이 선출되었고 그 다음 주일에 안수받았다.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봉천(奉天, Moukden, )에서 온 사람의 사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6년 전 부터 신앙인이 되어 있었고 그런 관계로 이 첫 모임에 참석했었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교회를 세운 세례교인 14명 중 13명이(봉천에서 온) 그 사람이나 그 뒤를 이어 봉천을 떠났던 다른 사람의 전도로 개종한 사람들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끈 사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은 공개적으로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1887년 9월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이 땅에 탄생시킨 장본인은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 섭리가 그러하듯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여러 손길의 합력을 통해 이룩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문안교회는 설립자 언더우드 선교사와 그를 도운 초기 한국인 전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으니 그 중에서도 한국 최초의 권서였던 서상륜(徐相崙)의 역할은 중요했다. 요컨대 새문안교회의 창립은 외국 선교사 언더우드라는 ‘씨줄’과 한국인 서상륜이라는 ‘날줄’이 마치 베를 짜듯 서로 어우러져 새문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새문안교회 100년사)


새문안교회 창립예배를 드린 언더우드 목사 사택 안의 일자형 한옥
새문안교회 창립예배를 드린 언더우드 목사 사택 안의 일자형 한옥


새문안교회 창립예배를 드린 언더우드 목사 사택 안의 일자형 한옥
새문안교회 첫 예배당

언더우드 목사가 그린 지형도
언더우드 목사가 그린 지형도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5. 교회 명칭



초기에는 정동예배당(貞洞禮拜堂) 또는 정동교회(貞洞敎會)로 불렸으며, 1895년 서대문안 대로변으로 옮긴 후 부터는 정동교회 혹은 서대문교회(West Gate Church)가 혼용되어 쓰이다가, 1907년 이후 현재의 위치인 염정동으로 교회를 옮긴 다음부터 새문안교회(Saemoonan Presbyterian Church)로 불렸다. 옛날 돈의문(敦義門)을 세워 그것을 ‘새문’이라 했기 때문에 그 안쪽을 새문안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 후 일제시대에는 한문으로 신문내교회(新門內敎會)로 또한번 교회 명칭이 변경 되는 등 1세기의 역사만큼 교회명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문안교회 100년사)


첫 예배당(정동, 1887)
첫 예배당(정동, 1887)

세 번째 예배당(로마네스크식 염정동벽돌예배당, 1910)
세 번째 예배당(로마네스크식 염정동벽돌예배당, 1910)

네 번째 예배당(고딕식 종탑, 1949)
네 번째 예배당(고딕식 종탑, 1949)

개축종탑예배당(1957)
개축종탑예배당(1957)

다섯 번째 모더니즘예배당(1972)
다섯 번째 모더니즘예배당(1972)


6. 새문안교회 첫 성찬식 (1887년 12월25일)



1885년 7월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튼, 헤론 그리고 그들이 가족들이 모여 주일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연합예배”Union Church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0월 11일 주일예배에서는 한국 최초의 성찬식이 거행되었는데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 목사가 인도하며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성찬식 집례는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하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는데 참석한 사람은 11명이었다.

그리고 새문안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식이 집행된 것은 1887년 크리스마스 날 언더우드 목사의 사저에서였다. 이 작고 역사적인 예식에는 선교사를 포함하여 일곱사람만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복음의 말씀이 이 땅에 심어진 지 실로 3년 8개월만의 일이요, 성서가 우리말로 번역된지 5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정동제일교회의 역사」 「새문안 85년사」



7. 상여(喪與)전도 (1889년)



기상천외한 새로운 전도방법을 창안, 이를 실천에 옮긴 일로 1889년 6월경의 일로 교인 가운데 상 喪 을 당하는 일이 많이 있자 이를 전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 방안인즉 교인 가운데 상을 당하면 전 교인들이 합심하여 상여喪與 를 만들어 교인들이 상여를 직접 메고는 장지를 향해 가면서 찬송가를 불러 “죽은 사람의 영혼을 즐겁게 하며” “하늘에 계신 상주께서 이 세상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리자 이와 같은 흥미로운 내용을 게재했던 당시의 〈그리스도신문〉은 ‘새문안교회 통신’이란 특별 란을 만들어 이렇게 전하고 있다.

교우가 신고ᄒᆞ(여) 발린ᄒᆞᆯ ᄯᅢ 에 교즁으로 샹례ᄅᆞᆯ ᄆᆞᆫᄃᆞ러 두엇다가 가지고 가셔 교우들이 샹례ᄅᆞᆯ 메고 길노가며 찬미ᄒᆞ야 죽은 사ᄅᆞᆷ의 영혼을 즐겁게 ᄒᆞ니 이런 일이 이왕에ᄂᆞᆫ 업고 구경도 못ᄒᆞ고 듯지도 못ᄒᆞ던 일이라

「새문안교회 100년사」



8. 목회자, 전도인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시작(1889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1901년에 설립되기 전 신학반 神學班, Theological Class 형태의 신학교육이 새문안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신학반은 1889년 1월에 언더우드 목사 주관하에 한 달간 서울 정동에서 한국인 학생 8명을 대상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매년 겨울을 이용해 한 달간 한국인 전도인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신학반이 운영되었는데 1891년부터는 기포드가 신학반 책임을 맡았다. 1891년 12월에 있었던 신학반에는 백홍준(의주), 김관근, 양순백(구성), 최명오, 우종서, 서경조(장연), 서상륜(서울) 등 16명이 참석하였다. 강의는 선교사 기포드 Daniel L. Gifford, 奇普, 마펫 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 게일 James Scarth Gale, 奇一 등이 맡았다. 이와 같은 초기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반 운영은 1901년부터 평양에서 시작되어 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명기에 신학교육이 새문안교회 안에서 시작되었다.



9. 첫 사경회(査經會, 1890년)



한국초대교회에서 주로 행해진 성경공부 집회로, 1890년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채에서 7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사경회가 최초의 것으로 기록되는데, 처음의 성격은 신학반神學班의 역할을 하여 각지에 조사助事를 파송하는 교육과정이었다.



10. 지교회 건립을 통한 지역 선교활동(1893년 ~ 1906년)



① 새문안교회는 1891년에 관내못골과 곤당골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관내못골은 여성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고, 곤당골은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새문안교회 저녁예배를 드리다가 1893년부터는 정식 주일예배가 개설되어 오늘날의 승동교회 勝洞敎會 가 된다.
② 1893년 언더우드 목사는 미국에서 모은 선교기금으로 남대문안 상가 지역에 전도소를 마련하여, 전도집회와 사경회를 열었고,
③ 다른 한 곳은 모화관에 예배처를 만들어 언더우드 부인 L. H. Underwood 이 전염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진료소와 여성집회를 인도했다. 특히 홀튼 여사의 여성 전도사업은 꾸준히 추진되어 여성들만의 집회가 매주 수요일에 모화관 여성 전도집회소에서 열렸다. 그녀는 여자성경반을 조직하여 성경공부를 가르치며 조선 여성들의 가정도 방문하였고, 여성들에게 읽는 것을 배우게 하여 철저하게 성경을 공부하도록 권면하였고 기포드 부인, 화이팅 Dr. Whiting G, 왐볼드 wambold 등도 여성들에게 성경공부 외에 합창을 가르쳤는데 5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④ 1894년에는 연못골에 교회가 개척되었는데 지금의 연동교회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보고서를 보면 연못골에 교회가 개척되었을 때 상당수의 정동교인 새문안 교인 들이 그곳으로 빠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

1894年(甲午)是年 公議會會長(공의회회장)은 裵緯良(배위량, William M. Baird))이라 是年에 선교사 元杜尤(언더우드)난 전도의 방침을 확장하야 徐相崙(서상륜) 金興京(김흥경) 朴泰善(박태선) 劉興列(유흥렬) 등으로 경성근방에 전도케하고 申和淳(신화순) 都正熙(도정희) 李春景(이춘경) 등으로 高陽(고양) 金浦(김포) 등지에 전도케하니 동시에 四五處( 4~5처) 교회가 신설되고 醫師(의사) 惠論(혜론, John W. Heron)은 銅峴(동현)에 병원을 설립한 후 一邊(일변으) 로 疾病(질병)을 救療(구료)하며 一邊으로 福音(복음)을 宣傳(선전)하야 隱然(은연)히 교회를 成立(성립)하엿더니 其後(기후) 병원이전시에 교인은 南大門外(남대문외)와 勝洞敎會(승동교회)로 分(분)하야 각기 大會(대회)를 意成(의성)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1890년대부터 서울장안은 물론 경기도 근교인 고양, 파주, 시흥, 김포, 광주, 행주 등지까지 전도하여 1900년대 접어들어 10여개의 지교회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지교회 설립운동을 벌인다. 그 당시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아직 미조직이었으므로 예배처소禮拜處所 혹은 전도소 傳道所 라고 불렀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목사 인도아래 주의 역사에 동참함으로써 7개소의 전도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명칭은 홍제동, 한강 漢江屯芝, 교북동, 김포 金浦, 행주 幸州, 동막 東幕, 파주 坡州 등이었다. 그러나 그때 형편으로 보면 이러한 지교회가 지방에 있기 때문에 경제문제와 예배인도자에 대해서는 모교회인 새문안교회가 돌보아 주고 있었다. 그 한 예로서 홍제동기도소만 보아도 새문안교회의 지도를 받았다. 집사들은 순번제로 한 명 또는 두 명씩, 매주일 아침이 되면 일찍이 기도소로 향했는데 그때는 도보로 2시간씩 걸리는 거리였다. 그곳에서 예배를 보고는 오후 3시경에는 그곳을 떠나 본교회로 와서 저녁예배시간에는 온 교우 앞에서 그날의 모인 출석, 연보 기타 사항등을 보고하곤 하였다. 또한 한강 전도소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곳은 조직상 아직 독립한 개체교회가 되지 못하여 제직은 부득이 새문안교회에서 선출하여 임명하였는데, 초대 영수 領袖 로는 이병연 李炳淵 이 피택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새문안교회로부터 전도소가 여러 곳에 설립되었고 나중에는 독립한 교회가 되어 서울근방 여러 곳에서 복음의 종을 힘차게 울리게 되었다. 기록에 보면 고영식, 김춘기, 김군병, 조마르다 등 여러 집사들이 지방에 나가 전도하였다.



11. 찬양가(1894년)



언더우드 목사가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악보 찬송가집으로 새문안교회에서 사용하였다. 120여 년 전 새문안교회에서 전국으로 울려 퍼진 찬송가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신앙고백과 기도가 담겨져 있다. 1894년 발행되었고, 초판에는 우리말 가사로 된 117편의 찬송가가 수록되었으며 매년 곡의 수가 증가된 증보판이 발행되었다. 찬송가집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오선보 노래집으로써 한국 근대 음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2011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찬양가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직접 번역한 찬송가가 25편이 있는데,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는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 목사의 찬양가(1984년) 표지와 제 1장

언더우드 목사의 찬양가(1984년) 표지와 제 1장


12. 두 번째 예배당 (한옥예배당, 1895년)



최초의 예배처소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채로 약 30명을 수용하였는데 다음해에는 교인이 50명을 넘어 돈의문(서대문)근처 피어선성경학원 앞에 있는 한 살림집을 얻어 확장한 후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교인수가 계속 늘어 100명을 넘어서자 새로운 예배당 건축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1895년 봄 수요예배 후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경희궁 건너편 큰 길가 피어선성경학원 바로 아래쪽에서 착공을 하였으나, 당시 한 가정의 월수입은 8원으로 500원의 건축비용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포드 선교사를 비롯해 많은 교인들이 직접 예배당 건축의 노역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그해 여름 콜레라가 창궐하여 예배당 건축을 중단하고 언더우드 목사 부부와 교인들이 간호와 구호활동에 헌신하자, 조선정부는 이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교인들의 인건비를 지급하였는데, 형편이 어려운 교인들이었지만 그 큰 금액을 그대로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그래서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자립적으로 마련하는 첫 번째 예배당이 되었다. 건축양식은 기와로 지붕을 덮고 벽은 흙으로, 창문은 종이로 바른 전형적인 한옥예배당으로 일자형 12칸짜리 목조건물로 최미(最美)의 한국식 예배당이었다.
이 교회의 신축을 위해서 교인들은 일화(日貨) 5백원을 헌금했는데 이는 미화(美貨) 250불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노동도 사실 그만한 분량의 것을 바친 셈이었다. 당시 월봉(月俸) 4불 평균의 교인들에게서 이만한 헌금과 노동이 제공된 것은 신비(神秘) 그것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에 이 아담한 예배당의 헌당식이 감격과 정숙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눈에 보이는 교회의 완성을 본 새문안 교인들의 영적생활은 이 형식(形式)의 외부적 신앙의 표현과 함께 더 깊이 승화되어 갔다. 우리교회는 서울 시내 중심에서 30마일 반경에 이르는 지역에 책임을 지고 18개소의 성서강습반을 가르쳤고, 매 주일마다 35 내지 40에 이르는 포교소에서 정규적인 회집을 인도하고 있었다. 사실 개 교회로서는 지나칠 정도의 무거운 책임을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수행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 새문안교회 초기의 면모였다.

한옥예배당 터
한옥예배당 터
한옥예배당 추정도(박병근 집사 작품)
한옥예배당 추정도(박병근 집사 작품)


13. 영신학당 (永信學堂) (1895년)



새문안교회가 처음에는 선교와 구제 및 성전건축사업에 치중하였으나, 후기에 접어들면서는 교육을 통한 교회의 내실화에 역점을 두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1895년 교회안에 교인자녀 교육을 위한 남녀 초등교육기관(Day School)을 설립해 운영하였는데, 그 경비의 반은 새문안교인들이 부담하였다. 이때 여선교사 웜볼드(Wambold)와 정동명(鄭東鳴), 송순명이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일제의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와 간섭으로 1915년 종교교회의 광진학교와 새문안교회의 영신학교를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그리고 북장로회 등 세 선교부 연합운영 학교로 통합해서 재정이나 교사진에서 우수한 조건을 갖추며 수창동(需昌洞, 현재 내수동 內需洞)에 교실을 건축하고 이름을 협성학교(協成學校)라 하여 남녀공학 350명의 학교로 출발을 하였다. 이렇듯 타 교파와의 협력과 이해의 심도(深度)가 새문안교회처럼 폭 넓었던 교회가 일찍이 없었다.


영신학교 제1회 졸업식(1915)
영신학교 제1회 졸업식(1915)


14. 새문안교회 애국가(1896년)



우리나라 <애국가>의 효시. 1896년 고종 황제 탄신일을 맞아 새문안교회 성도들이 축하예배를 드릴 때 만들어 불렀던 노래이다. 발표 당시에는 <황제탄신 경축가> 또는 <애국가>라는 제목으로 불렸으나, 또 다른 <애국가>와 구분하기 위하여 후학들이 <새문안교회 애국가>로 명명하였다. 미국 장로교 찬송가이자 한때 미국 국가로 불린 America의 선율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원래는 영국 국가의 선율이었으며 현행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와 같은 곡이다. 모두 5절로 되어있다.




15. 국왕탄신 특별예배 (1896년)



1896년 10월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보고서에는 당시 새문안교회의 집회상황을 알 수 있는데 정기집회로는 주일에만 3회의 예배와 주중 5회의 집회가 있었으며 새문안교회 주관 하에 서울시내에서 열리는 전도 집회가 매주 4회씩 열렸다. 그리고 특별예배로 부활절, 성금요일, 성신강림절 예배가 드려졌고 이와 함께 국왕탄신일을 기념하는 특별예배가 있었다.
국왕탄신일에 특별예배를 드리자는 생각은 정동(새문안) 교인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 생각은 다른 교회에도 전달되어 함께 특별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대한성교서회에서 거기에 맞게 제작한 특별 전도지 약 8천장이 뿌려졌습니다. 그리하여 국왕탄신일에 모화관에서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집회가 열려 기도와 찬양 및 애국연설이 진행되었습니다.


1896.7

고종탄생일축하


16. 최초의 연합예배(1902년)



1902년 서울시찰회 Seoul Session 가 홍문섯골교회를 폐쇄시키자 선교사들은 150명의 교인들을 기도처가 있는 제중원(구리개병원)에 모이게 하여 동현 구리개 교회가 설립된다. 1902년 3월 16일, 주일 오후에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 그리고 동현교회 교우 300여명이 동현교회의 예배처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는 서울에 있는 교우들이 함께 드리는 최초의 연합예배였다. 동현교회는 레이놀즈 William Davis Reynolds, 李訥瑞 목사가 담임했는데, 동현교회가 설립되면서부터 새문안, 연동, 동현교회 교우들이 매주일 오후마다 연합예배를 드리고, 3개월마다 연합으로 성례식을 거행하는 등 세 교회가 한 계획과 한 목적으로 하나의 교회로 연합되어 갔다. 그러나 제중원이 선교병원으로 되자 매달 500명의 환자를 치료하게 되어 병원확장이 시급해졌다. 그래서 장로회선교회는 미국 클리브랜드의 실업가 헌금으로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11,000평의 병원 부지를 확보하여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The Severance Memorial Hospital 을 11월 건립하였다. 이에 따라 제중원 터와 건물이 정부에 환수되면서 2년 8개월 넘게 드리던 연합예배가 끝나게 된다.



17. 송순명(宋淳明) 장로 장립(1904년)



우리나라가 개항되기 2년 전인 1874년 서울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한 후 고아로 떠돌다가 12살 되던 1887년경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고아학교에 인도되어 그 곳에서 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새문안이 창립되던 그 해에 새문안과 인연을 맺은 후 전 생애를 새문안교회와 함께 한 새문안 ‘뿌리’라 하겠다. 우선 그는 성경에 밝았다. 당시 교인들은 그를 가리켜 “송신약(宋新約)”이라고 지칭했는데 신약전서 전체를 암송할 정도로 평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교인들에게 늘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초기 한국 복음전도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대표적 권서(勸書)의 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언더우드 목사의 도매서(都賣書)로 그의 산하에 여러 명의 일반 매서인을 두고 전국을 순회하며 성경과 전도 문서를 보급, 판매 하는 등 초기복음전파사업에 큰 공헌을 남겼다. 1904년 10월2일 새문안의 초대장로로 장립된 송순명 장로는 1957년 12월 3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만 70년간을 새문안을 섬기며 봉사하신 새문안의 원로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문안은 12월 5일 새문안 뜰에서 교회장(敎會葬)으로 모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송 장로에게는 이렇다 할만한 가족과 자식이 없었고 지금도 그의 후손을 찾을 길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송순명 장로, 네 번째가 김영주 목사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송순명 장로, 네 번째가 김영주 목사

교회창립70주년 행사 때 장기근속 수상 사진



18. 활발한 지교회 설립운동 (1906년~1911년)



1905년 을사오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일본에 강점당하면서 다소 주춤했던 지교회 설립운동이 1906년 들어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06년 한 해만도 파주군에 죽원리교회(竹阮里敎會), 가학리교회(駕鶴里敎會), 노량교회(鷺梁敎會)와 김포군에 용강리교회(龍康里敎會)를 개척하였으며, 1907년에도 파주읍 일대 신산리, 갈현리, 용미리, 등원리, 발도리, 덕천리, 부작리, 금촌 등지에 지교회를 설립하는 등 교회 초기 때부터 시작된 경기 일원에 대한 지교회 개척사업이 계속되었다. 1890년대부터 시작한 경기 일원의 지교회 설립운동을 1910년대까지 꾸준히 벌렸는데, 이때 이 일을 맡아본 전도인은 최덕준(崔德俊), 이춘경(李春慶), 도정섭(都政燮), 윤상덕(尹相德), 이용석(李用錫), 신화순(申和淳) 등으로 1890년대부터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경기 일원에 새문안 지교회를 세워 나간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었다.

서교동교회
영등포교회
능곡교회
신사동교회
노량진교회
김포제일교회
금촌교회


No

교회명

창립교회명

현재교단

창립년도

담임목사

교회 주소

1

새문안

정동

통합

1887년

이상학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2

서교동

잔다리

통합

1895년

우영수

서울 마포구 서교동

3

김포제일

김포읍

합동

1896년

정운락

경기도 김포시 북변동

4

행주

행주교회

합동

1896년

정건화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

5

능곡

사산(사뫼)

기장

1897년

윤인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토당동

6

송마리

송마리

통합

1897년

추진규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송마리

7

신사동

신사리

기장

1901년

임홍빈

서울 강남구 신사동

8

대원

죽원리

합동

1901년

김현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대원리

9

영등포

영등포

통합

1903년

임정석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10

광명

광명리

기장

1903년

박승희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11

신산

신산리

통합

1903년

노기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12

시흥

시흥리

통합

1904년

이주영

서울 금천구 시흥본동

13

누산

누산리

통합

1904년

문수근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누산리

14

하안

하안리

기장

1905년

이석석

경기도 광명시 하안1동 산

15

탄현

대동리

기장

1905년

김정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16

청천

청천

통합

1906년

김종성

충북 괴산 청천면 청천리

17

노량진

노량

통합

1906년

여충호

서울 동작구 본동

18

양평동

양평리

통합

1907년

김 규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19

갈현

갈현리

통합

1907년

최성수

경기 파주 탄현면 갈현리

20

금촌

금촌

통합

1907년

오성민

경기 파주시 금촌2동

21

개곡

개곡

합동

1900초

장효섭

경기 김포시 월곶면 개곡




19. 당회록, 새문안교우문답책(1907년)



현재 새문안 최고(最古)의 기록으로 <1907년 당회록>과 <새문안교우문답책>이 남아 있다. 초기 당회의 중요한 일은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 문답하는 일이었다. 오늘에 비해 당시 세례문답은 대단히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새문안 당회록
새문안 당회록


새문안교우문답책



20. 세번째 예배당(로마네스크식 벽돌예배당, 1910년)



청일전쟁 후 교회를 찾는 사림들이 급증하였고 교회가 신작로 대로변으로 옮기자 새문안교회를 찾는 교인이 증가하였다. 새 한옥예배당을 헌당한 1895년 말에 교인수가 이미 156명이 되어 교회가 비좁아지자, 교인들 사이에 더 큰 예배당을 건축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896년 가을에는 예배당 건축을 위한 주일헌금으로 1,591냥을 마련하였으며 특별건축헌금으로 2,097냥을 별도로 비축해 나갔다. 그리고 큰 길 건너편에 부지를 마련하여 예배당을 짓고 그 당시 쓰던 건물은 주일학교 교사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예배당 예정부지가 경희궁과 너무 가까워 정부의 인가를 얻기 어려웠으며, 언더우드 목사는 그의 사역 범위가 확장되고,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교회 건축에 전념할 수 없어서 계획은 바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1907년 마침내 본래 바라던 서소문 안 대로변의 현 위치를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 이 터는 염정동에 속해 있었고, 이 지역은 ‘밤길은 환하게 비추는 고개’라는 뜻의 ‘아주개’라고 불려 졌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새로 건축하기로 하고 완공하기까지 장장 15년 동안 교인들이 기도하게 하셨다. 1910년 5월 29일 헌당예배는 최병헌 목사(정동교회)가 기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성경봉독을 하였고 김규식 집사가 봉헌사를 하고 설교는 언더우드 목사가 하였다. 그리고 헌당기도는 서경조 목사가 축도는 한석진 목사가 담당 하였다. 이 날 참석인원은 1,500여명으로 교회 예배당 밖에서도 300여명 이상이 서서 예배를 드렸다. 「새문안 85년사」

염정동-벽돌예배당(1910)
염정동-벽돌예배당(1910)

로마네스크식 벽돌예배당
로마네스크식 벽돌예배당

벽돌예배당-내부-전경(1930년대-모습)
벽돌예배당-내부-전경(1930년대-모습)


21. 전도부인 활동(1910년)



1910년 여집사, 여조사(女助師), 여매서인(女賣書人) 등으로 구성된 새문안 전도부인들은 주일마다 짝을 지어 서울 근교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새로 믿기로 한 초신자들을 모아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믿기로 결심한 초신자들을 주일날 교회로 인도하여 결신의 시간과 환영의 순서를 갖고 이들에게 외국인 선교사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하기도 하였다. 당시 새문안 전도부인들의 전도지역은 주로 시흥군과 고양군 일대였는데 이곳에 20여 명에서 40여 명씩 모이는 전도처를 여러 개 개설 해 놓고 이 장소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새신자와 불신자의 전도를 지속적으로 펴 나갔다. 이 때 활동한 전도부인들로는 김진애(金眞愛), 이우영(李友永), 김준신(金俊信), 심창덕(沈昌德) 조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에게 언더우드 목사는 “5인씩 작반(作班)하여 불신자(不信者) 1인씩 인도하여 돌아오도록” 하는 전도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22. 경기충청노회(京畿忠淸老會)의 결성과 ⌜예수교장로회총회⌟의 조직(1911년)



1911년 12월 4일에 경기 충청도 일원에 있는 장로교 소속 교회들로 결성된 경기충청노회의 창립회의가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1907년 독로회가 조직된 이래 그 산하에 7개 대리회(代理會)가 있었으나 이 중 충청도지역의 교세가 매우 미약하여 독립된 노회를 결성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교세가 강한 서울지역과 인접한 지리적 조건 등을 고려하여 경기 ‧ 충청지역의 교회를 하나의 노회로 묶기로 한 것이다. 새문안교회에서 진행된 이날의 창립노회에서는 회장에 밀러(F.S. Miller, 閔老雅), 부회장에 클라크(C.A. Clark, 郭安連) 그리고 서기에 새문안교회의 김규식 장로가 선임되었다. 경기충청노회의 창립을 새문안이 주도함으로써 이후 새문안은 서울 ‧ 경기지역은 물론 충청도지역 교회들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전도사업을 펼쳐나가게 되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역사적인 창립을 하였다. 이 자리에 새문안에서는 언더우드 목사, 서경조 목사, 김규식 장로가 경기충청노회의 총대로 참석하였다. 이 날 총회 창립식에는 전국교회와 노회를 대표한 총대 목사 장로 333명이 참석한 대규모의 집회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총회 창립식에서 초대 총회장으로 새문안교회의 당회장인 언더우드 목사가 피택되었다. ‘일곱 노회가 하나의 연합된 몸’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해 일곱가지 색깔로 무늬진 사회봉 ‘고퇴(叩堆)’를 손에 쥔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 목사는 취임설교에서 세가지를 힘주어 피력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와 신자 그리고 신자와 신자사이는 늘 연합되어야 하며 둘째, 이 악한 세상에 우리 믿는 자의 행위로 그리스도의 존재를 드러낼 것과 셋째,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쓴 잔을 받으신 것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드릴 각오와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비장한 내용의 설교를 하였다. 장차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한국교회가 당할 고난과 환난을 미리 예견한 듯한 예언자적인 설교내용은 큰 감명을 주었다.
고퇴* : 장로교 총회나 노회시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

한국선교30주년 기념예배 때 설교하는 언더우드 목사(1914.4.6.)
한국선교30주년 기념예배 때 설교하는 언더우드 목사(1914.4.6.)

새문안교회당에서-열린-제34회-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1948.4)
새문안교회당에서-열린-제34회-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1948.4)

1912년 예수교장로회 총회
1912년 예수교장로회 총회



23. 새문안의 초기 근대음악가(1910년 ~ 1933년)



김인식(1885~1962)
이상준(1884~1948)
김형준(1885~ ?)



- 최초의 음악교사로 기호, 진명, 배재, 오성, 경신 등의 음악교사로 활동
- 홍난파의 스승
- 최초의 한국인 작곡가
- YMCA 경성최초의 합창단 조직
- 일제 강점기 민족 찬송가 운동 주도
- 창가 작곡(최소 70곡)
- ⌜중등창가집⌟, ⌜독습중등 창가집⌟,⌜보통악전대요⌟
등많은 음악교재 발간
- 휘문 양정, 숙명, 보성, 중앙
에서 음악교사로 활동
- 1933년 조선음악가협회‘근대
음악초창기의 공로자’로 표창
- 성악가, 코넷 주자
- 활발한 연주 활동
- 정신, 경신 음악교사
- 1933년 조선음악가협회
‘음악초창기의 공로자로표창
- 일제 강점기 민족찬송가
운동주도
- 찬양대지도(1910~1918)
- 집사(1914~1917)
- 장년부장(1915)
- 공동의회 임시서기(1916)
- 찬양대원(타 기록 확인)
- 집사(1911~1918)
- 유년부장(1915)
- 면려회 서기 (1914)
- 주일학교 교감대리 (1914)
- 유년부장 (1915)
- 집사(1915~1918)
- 찬양대원 (1917)
- 찬양대 인도 (1926)
- 찬양대 지도위원 (1933)
- 찬양대 대장 (1938)
- 전도사 시무 (1941~1942)
김영환(1893~1978)
난파 홍영후(1898~1941)
독고선(1899~1971)



- 최초의 정규음악교육을 받은 음악가
- 연회전문 음악과장
- 숙명여고 음악교사
- 홍난파와 함께 활발한 연주활동
- 하이페츠, 짐벌리스트 등
세계적인 음악가 연주회 조치
-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 최초의 음악잡지 발행인
- 최초의 예술가곡(봉선화) 작곡
- 최초의 방송관련악단지휘자
- 최초의 음악평론가
- 최초의 실내악단 조직
- 이화여전, 중앙보육, 경성보육
교수 역임
- 피아니스트
- 중앙보육학교 교수
- 연희전문 사중창단으로 활약
- 중고학교 음악교과서
수록된 서계 명곡
번역가
- 경성보육학교 설립자
겸 교장
- 찬양대지도(1921년 이후)
- 집사(1924~1932)
- 찬양대 지도위원 (1933)(1915)
 
- 입교(1911)
- 찬양대원(타 기록 확인)
-면려위원(1917)
- 교회 부지에 연악회관 지어서
사용(1924)
- 찬양대 인도 (1931)
- 찬양대 지도위원 (1933)
김원복(1908~2002)
홍성유(1908~1936)
최성두(1909~1981)



- 최초의 부부 음악가(홍성유)
- 70여 년간 연주 활동
- 경성보육(1935),
이화여전(1938) 교수
- 고려교향악단 피아노 주임
(1945)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46~1974)
- 예술원 회원

- 바이올리니스트
- 최초의 실내악단
난파 트리오 결성
- 피아니스트
- 연희전문 사중창단으로 활약
- 전조선 음악동호회(1934)
- 고려레코드사 설립(1946)
- 음악강습소로 유치원 사용
- 찬양대 지도(1931)
- 입교(1922)
- 귀국환영회(1931)
- 찬양대 지도(1931)
- 찬양대 지휘(1933)
이인범(1914~1973)
문학준(1914~1988)
이유성(1915~1991)



- 연희전문 사중창단으로 활약
- 전 일본 콩쿠르에서 성악부
수석입상(1939)
- 국립오페라 초대 단장
-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자
대학교 음학대학 교수
- 바이올린 연주가
(홍난파에게 배움)
- 고려교향악단 단장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 경성중앙방송관현악단 단원
- 고려교향악단 창립 주도
- 서울대학교 음학대학 교수
- 1930년대 찬댱대원
-1930년대 찬양 대원
-1930년대 찬양 대원


24. 주일학교 조직(1917년)



처음 출발한 주일학교는 1917년 장년들만을 위한 조직이었다. 6월 17일 당회에서는 원한경과 장붕 張鵬 조사를 주일학교 이사(지금의 반사)로 임명하여 성경공부를 위한 조직적인 주일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1919년 9월 14일부터는 유년주일학교를 시작할 것을 가결하고, 반은 남녀를 갈라서 초등반, 중등반, 고등반으로 하였고 교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직원양성반까지 두었다.




25. 서경조(徐景祚)목사



한국 최초의 7인 목사중의 한 분으로 서상륜의 동생이다. 1884년 형의 권면으로 개심한 후 1885년 서상륜과 함께 소래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언더우드 목사는 선교사들을 총괄하는 일 외에도 잦은 지방전도여행과 해외출장 등의 일에 쫓겨 새문안교회 있는 날은 그리 많지 못해서 서경조 목사가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새문안교회의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였다.



1898. 소래교회 서경조 가족

1905~1907년 추정.평양신학교 학생들과 선교사들, 아래 우측 서경조목사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평양 신학교 제1회생)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이기풍

26. 김규식(金奎植) 장로 장립



우사(尤史) 김규식은 식민지 시대(1910~1945)와 해방 공간(1945~1950)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이후 민족분단을 막기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며 철저한 민족주의 노선에 섰던 정치가의 한 분이다. 그는 새문안에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문안 집사, 장로로 활동한 새문안에서 키운 대표적인 인물이다. 1887년 언더우드 목사의 손에 이끌려 수양아들로 키우게 되었고, 1887년 미국의 로녹대학교(Roanoke University) 영문과에 입학하여 1903년에 졸업하였다. 이어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Princeton University Academy)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이듬해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는 우사에게 박사학위 과정에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우사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며 이를 거절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1905년 귀국한 우사는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가 되었고 교육에 투신하여 경성 YMCA청년회 총무, YMCA 영어학당 교수, 경신학교(儆新學校) 교수와 교감등을 겸임하였다. 1910년 12월 18일 김규식은 장로로 장립되어 새문안 초기 당회의 서기직을 맡아 보는 등 교회를 위해 헌신봉사 하였다. 그러나 191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일본의 교회 탄압이 시작되자 김규식 장로는 1913년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직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 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전권대사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같은 해 학무총장,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겸임하고 1920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여했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광복이후, 귀국,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다.


미군정자문기구에서 연설하는 김규식. 옆에 이승만, 김구



27. 서병호(徐丙浩) 장로



서병호 장로는 김규식 장로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가 새문안에서 키운 대표적 인물로 한국최초의 유아세례자이다. 호는 송암松巖이고 김규식과는 동서간이며 김필례, 김점동과 인척간이었다. 1911년 당회의 임시 서기로 봉사하던 그는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을 한 후,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임정 산하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하였으며 1927년에는 김규식 등과 함께 영어 교육을 목적으로 남화학원을 설립하였고,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의 한 분이다. 그는 1947년 8월 귀국한 후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 일체 정치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모교인 경신학교 교장과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며 평생 기독교와 관계된 봉사활동에 진력하였다

교적부
서병호 일가의 교적부

서병호 원로장로 추대기념과 당대교회 지도급 인사들(1968)
서병호 원로장로 추대기념과 당대교회 지도급 인사들(1968)


28. 연합 감사절예배(1912년)



1912년 초에는 새문안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서울시내 모든 교회들이 연합하여 감사절예배를 드렸고, 구세군 성가대가 찬양순서를 맡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새문안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 규모의 대소에 관계없이 여타 교회들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를 새문안의 움직일 수 없는 전통과 정신의 하나로 구현해 나갔다.



29. 언더우드 목사 별세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 30분 미국 뉴저지주의 아틀랜틱시 Atlantic City 의 저택에서 향년 57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885년 4월 5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내한 來韓 하여 31년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국 복음사업에 모든 삶을 바친 언더우드 목사의 삶은 조선의 복음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자기를 바쳐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 삶이었다.

元杜尤 紀念碑文
博士西來 求天榮冕 盡瘁敎育
박사서래 구천영면 진췌교육

肇宣福音 爲世光鹽 闡發文化
조선복음 위세광염 천발문화

推厥赤心 打破昏暗 庸誌茂績
추궐적심 타파혼암 용지무적

敷玆靑邱 提醒愚迷 咸稱保羅
부자청구 제성우미 함칭보라
박사께서 서쪽(미국)에서 오셔서 하늘의 영화로운 면류관을 구하시고
교육에 온 몸을 다 바치셨네

복음을 처음으로 전파하사 온누리에 빛나는 귀감이 되시고
한껏 새 문화를 펴셨네.

진심을 다해 무지를 타파하시니
이에 거룩한 큰 공적을 기리는도다.

이 땅에 펼쳐보이신 바 우매함을 일깨우시니
모두가 바울이라 칭하였네.

1916년 10월 12일, 5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16년 10월 12일, 5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원두우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새문안교회 경내에  조선예수교총회가 세운 기념비문(1927)
원두우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새문안교회 경내에 조선예수교총회가 세운 기념비문(1927)

언더우드-선교사-(원두우-元杜尤)-Horace-Grant-Underwood-(1859-1916)
언더우드-선교사-(원두우-元杜尤)-Horace-Grant-Underwood-(1859-1916)

언더우드-부인-Lillias-Horton-Underwood-(1851-1921)
언더우드-부인-Lillias-Horton-Underwood-(1851-1921)

미국 브루클린 라파예트 5가의 장로교회에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
장례식, 1916
미국 브루클린 라파예트 5가의 장로교회에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 장례식, 1916


30. 차재명(車載明) 목사 (1881~1947)



평안북도 용천 용암포에서 출생하여 1905년 기독교에 입교 그 다음해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유명했던 기독교학교(Mission School)인 선천(宣川)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졸업한 후 1910년 새문안의 조사(助師)로 봉직하면서 1912년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 장로에 피택되었으며 이후 교회의 재정적 후원과 협조를 받아 191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0년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26일에 차재명 목사의 위임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차 목사는 장장 21년간 포악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자행되던 형극의 시대에 새문안 강단을 지켰으니 그는 그의 전 생애를 새문안 강단에 헌신한 목회자였다. 특히 차 목사는 교회 행정 쇄신조치로 심방제(尋訪制) 기구화한 점과 주일학교 조직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의 탄압으로 차 목사는 1941년 8월 30일 새문안을 떠나게 되었다.

차재명 목사 부부
제1회 평양신학대학교 졸업생(좌측 하단이 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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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찬양대 창설



새문안교회 찬양대 讚揚隊는 1913년에 조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1898년에 이상준이 지휘했다는 ‘1898년 설’, 1910년에 김인식이 조직하여 지휘했다는 ‘1910년 설’이 있으나 〈새문안교회 70년사〉 에 1913년에 조직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있다. 차재명 목사 부임 이후에는 새문안 교인들로만 구성하도록 정비하기도 한 새문안찬양대는 1931년 8월부터 김기봉金基奉이 중심이 되어 차형기車亨基, 차목사 자제등 10인으로 조직된 새문안관현악대로 발전하였다. 당시 새문안찬양대와 관현악대를 지휘하며 이끌어간 인물은 김인식金仁湜, 이상준李相俊, 김영환金永煥, 김형준金亨俊, 홍영후洪永厚, 독고선獨孤璇 그리고 홍성유洪盛裕 등 당대 대표적인 음악인들이었다.

새문안교회 찬양대원들(1924년 7월)
새문안교회 찬양대원들(1924년 7월)

1950년대 찬양대
1950년대 찬양대


32. 영어성경반(English Bible Class, 1921년)



새문안교회는 청년학생층을 위한 영어성경반 English Bible Class 을 개설하였다. 차재명 목사가 부임한 직후 1921년 3월 13일부터 시작하였는데 당회에서는 이 반의 지도를 위해 원한경 장로와 오긍선 영수를 임명하였다. 이 반은 청년·학생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1950년대말 영어성경연구반 모습
1950년대말 영어성경연구반 모습

33. 새문안교회와 연악회(硏樂會)(1922년)



연악회는 새문안교회의 음악가들인 김인식, 김영환, 김형준, 홍난파, 김원복, 홍성유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에 창립한 음악 단체이다. 음악 교육사업을 비롯하여, 연주사업, 음악연구사업, 음악 출판사업 등을 전개하면서 조선의 음악계를 주도하였는데, 1920년대 조선의 음악계는 연악회가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동아일보⌟ 1924년 11월3일자로 보도된 “연악회의 회관이 서대문정 일정목 오십번지 새문안예배당 안 빈터에 준공되었다”라는 기사가 말해 주듯, 연악회 회관이 새문안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새문안교회가 당시 음악활동의 중심무대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1925.5.23 연악회 회우부원 일동, 앞줄 우측 첫번째가 홍난파
1925.5.23 연악회 회우부원 일동, 앞줄 우측 첫번째가 홍난파

1926년 1월. 연주회를 마치고(왼쪽 끝 홍난파)
1926년 1월. 연주회를 마치고(왼쪽 끝 홍난파)



34. 유치원 개원



새문안에 유치원이 정식 개원된 것은 1929년 5월 1일이다. ‘신문내유치원(新門內幼稚園)이라는 이름으로 개원되었는데, 원한경(元漢慶) 장로를 설립자로 하고 원장에 차재명 목사, 원감에는 강헌집(姜憲集) 장로, 회계에는 송명애(宋明愛), 차활란(車活蘭) 집사 2인이 선정되었다. 당시 교회 재정 형편으로 보아 매우 어려웠던 시절 많은 경비를 요하는 유치원을 개원하기까지는 원한경 장로의 힘이 컸다.

유치원 어린이 유희 모습(1930년대)
유치원 어린이 유희 모습(1930년대)

제1회 새문안유치원 졸업생 기념사진
제1회 새문안유치원 졸업생 기념사진


35. 부인회(婦人會, 여전도회) 활동(1930년대)



193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사회와 교회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 새문안은 비교적 안정을 찾고 있었다. 우리 교회보다 좀 더 어려운 이웃과 교회들을 돕는 구제사업과 전도운동에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이었고 이 일들이 주로 새문안 부인회 즉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부인회가 힘써 펼친 활동의 하나가 구제사업이다. 타 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보조한 일도 많으며 때로는 지방에 발생하는 수재민을 위한 구제활동에도 열성적이었고, 서울시내 맹아들을 위한 전도와 구제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손길이 국내뿐만 아니라 멀리 해외동포에까지 미쳤다.



36. 가정사경회(家庭査經會) (1939년대)



일제강점기의 교회가 그 수난의 때를 견뎌나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교인 개개인의 신앙적 결단과 신앙생활의 심도를 더해가는 일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더욱 강화된 것이 가정사경회였다. 1939년 3월부터 교인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10여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가정사경반을 설치하여 매주 한 차례씩 성경연구집회를 개최하였다. 서대문정西大門町구역은 차재명 목사가, 북아현정 北阿峴町 구역은 이주옥 李珠玉, 죽첨정 竹添町구역은 이순용 李順用, 행촌정 杏村町 구역은 김혜숙 金惠淑 , 현저정 峴低町 구역은 조병린 趙炳麟, 중림정 中林町 구역은 이재옥 李載玉, 효자정 孝子町구역은 남궁진 南宮榛, 홍파정 紅把町 구역은 구정서 具貞瑞, 필운정 弼雲町 구역은 원관호 元觀瑚, 혜화정구역은 이마리아 李瑪利亞, 당주정 唐珠町 구역은 차활란 車活蘭 등이 가정사경회를 책임지고 있었다.



37. 김영주(金英珠) 목사 (1896~?)



1896년 12월 21일 함북 명천에서 출생했다. 신앙이 깊던 누이의 영향으로 교회생활을 시작하였고 명천교회 영수이던 매형의 지도를 받았다. 14세부터 성진에 나아가 신학문을 익혔고 성진 주재 캐나다 선교사의 어학선생 노릇도 하였다. 원산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 출신의 전금옥(全錦玉)과 결혼했고 성진에서 고신여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일본에 유학하여 간사이(關西)학원 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면서 오사카(大版) 혹쿠(北區)한인교회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1933년 간사이 학원을 졸업한 그는 봄에 서울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12월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1934년 6월 남대문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었다. 1944년 1월에 새문안에 부임한 해암(海岩) 김영주 목사는 교회 내적으로 매우 어려운 때였고,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부임하였다. 그해 2월6일 정식으로 목사 위임식이 거행됨으로써 새문안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적 배경과 경향은 진보적이었다. 새문안이 과거와 달리 이 시기에 들어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목회자를 필요로 했음은 당시 내외적인 조건, 즉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현명한 판단이었다. 일제의 말기적 행태를 지혜롭게 견디며 곧 다가올 해방의 그날을 전망하면서 새문안은 보다 폭넓은 목회자를 세운 것이다. 어둠의 끝에 서서 교회와 신도들은 이제 마침내 비칠 새 빛을 기다리며 그 암흑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어서도 교회개방정책은 변함이 없었고 ‘시대의 등불이 되자’는 표어아래 시대를 이끌기를 소망해 그의 목회도 민족에게 비전을 주자는 것이었다. 1950년 6‧25사변이 터지고 서울에 잔류해 교회를 지키던 김목사는 그해 8월23일 공산군에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 김영주 목사의 생애는 무엇이 교회를 위하는 참 자세인가를 살피게 해 주었다.



1
1927년 회령성경학원
1947년 총회
1949.7.31. 새문안교회 개축제직일동


38. 8 · 15 해방과 새문안교회(1945년)



35년의 긴 박해와 순교의 일제 통치가 종식을 고하던 1945년 8월 15일, 전국의 성도들은 무릎을 꿇고 감격의 기도를 드렸다. 해방 후 8월 17일, 새문안교회가 중심이 되어 감리교의 맹기영, 윤원호, 성결교의 윤판석, 장로교의 안병무, 김태범 등 서울시내 교회 청년 30여 명이 새문안교회에 모여서 조선기독교청년동맹 鮮基督敎靑年同盟 을 결성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어 연합군에 대한 환영, 각 교파 교회청년회의 재건,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귀국하는 동포들을 위한 구호와 봉사활동에 적극 나설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장로교의 김영주, 송창근, 김종대, 함태영 등과 감리교의 강태희, 김영섭, 심명섭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이름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꾼 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이른바 남부대회를 소집하였다. 이처럼 새문안교회는 남한에 있는 교회재건의 산지産地 그리고 청년회의 줄기찬 재건과 민족 역사에의 책임의 발상지로 등장하였다. 또 새문안교회는 일제의 간섭으로 해체되었던 청년면려회를 고응진, 정충희, 백춘학, 박두영, 김병권, 민종식, 송순옥 등에 의하여 재건하였다. 또한 농촌봉사와 의료선교로 해방 이후의 공백기를 채워가고 있었다. 역시 일제의 강요로 해산되었던 소년회가 학생회로 다시 조직되었는데, 최명문 전도사나 김병권 집사가 이 재건기에 헌신한 열정은 지금도 새롭게 기억된다. 그리고 새로운 감격으로 재건 또는 신설되는 기관으로 유년주일학교, 여전도회를 비롯해서 그 수가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미영 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로 나와 환호하 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등켜 안고 복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 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39. 네 번째 예배당(고딕식 종탑예배당, 1948)



1937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하였던 교회건축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래서 해방 직후 교회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교회의 증축이었다. 오래전부터 교회 공간이 너무 좁다는 현실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광복과 함께 새로운 교회에서 믿음을 새롭게 하겠다는 소망도 한 이유가 되었다. 1946년 4월28일 당회는 “본 교회의 증축은 교우 일동이 다년간 희망해 온 바 당회가 증축키로 가결하고 내(來) 5월5일 제직회에서 결의하기로 작정한다”고 결의 하였다. 그해 5월 27일부터 1주일간 교회 증축을 위해 인천 내리교회 강태희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열었다. 먼저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이 기간에 드려진 40여 만 원의 헌금은 교회 증축을 위한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1946년 7월1일 시공하여 1948년 봄에 준공되었고 헌당예배는 1949년 7월 31일에 드렸다.





40. 새문안청년회의 무의촌진료사업 (1949년)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던 청년면려회가 해방 후 제 모습을 되찾아갔다. 고응진(高應振), 정충희(鄭忠熙), 백춘학(白春鶴), 박두영(朴斗榮), 김병권(金幷權), 민종식(閔種植) 등과 여성으로는 송순옥(宋順玉) 등이 청년면려회 재건에 적극 노력하였다. 이들은 농촌활동 및 의료선교 등을 통한 사회활동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우리교회 청년들이 세브란스병원의 의사 및 간호사들과 함께 무의촌을 방문, 그곳 주민들을 성심껏 치료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공보> 1949년 1월11일자에서 “새문안교회청년회서 무의촌진료사업에 궐기(蹶起)”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 25일 주일 새벽 이곳 고양군 지도면 행주교회당(幸州敎會堂)에서는 예기하지 않았던 진객 10여 명이 래착하였다. 이 뜻하지 아니한 손님은 서울 새문안교회 청년회장 고응진(高應振) 씨의 안내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감 이병희(李炳熙) 선생과 부속병원 송요섭 선생이 인솔하는 남녀 10여명의 의사와 간호원으로 편성된 무의촌 치료반이다. 새벽 6시부터 벌써 남녀노소의 환자가 모여든다. 가난한 시골 살림에 기를대로 기른 병이라 치료도 간단치는 않았지만 저녁 6시까지는 백여 명의 환자를 진찰하고 주사 놓고 약을 주었다. 비록 하루 동안의 일이지만 그렇게도 안타깝게 의사를 기다리던 이곳 사람을 베푸는 정신적 위안은 육체의 병 치료 이상의 것이었다.

당시 이병희 李炳熙 집사가 세브란스 의대의 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청년회장 고응진과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이같은 봉사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도 현대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무의촌이 적지 않은데, 하물며 당시로서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교회의 청년들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 생활에만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직접 생활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고양군 지도면 행주교회를 방문, 세브란스병원의 의료진과 함께 그곳 환자를 치료하고 처방하는 뜻깊은 봉사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당시 새문안청년회 회원 가운데 의대생들, 즉 송요섭, 송순옥, 조성제, 김금선 등은 여름방학 때면 서울근교 무의촌 부락을 찾아가 의료선교활동과 함께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하였으며, 교회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은 헌옷을 곱게 다듬어 어려운 농어촌에 보내기도 하였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서의 의료봉사활동(1959)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서의 의료봉사활동(1959)

부민교회 무료진료(1970년대)
부민교회 무료진료(1970년대)

시골교회 헌옷보내기(1947년)
시골교회 헌옷보내기(1947년)

필리핀 의료선교
필리핀 의료선교

의료선교부-활동(2002년-태국)
의료선교부-활동(2002년-태국)

의료선교활동
의료선교활동

의료선교활동
의료선교활동



41. 강신명(姜信明) 목사(1909~1985)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청지기로 살고 가신 소죽小竹 강신명 목사는 경북 영주에서 한글학자이던 강병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양 숭실학교,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서 평양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그 후에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새문안 교회 부임 전까지,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던 중 동사목사 제도의 폐지로 새문안교회에 부임한 강신명 목사는 부임한지 1년 만에 주일 출석교인이 800명을 넘어섰다. 신학교 시절 300여 곡의 동요를 작곡한 정도로 음악에도 높은 소양을 지닌 목회자였으며, 한국 교회와 새문안 교회에 남긴 유산은 지대하다. 첫째는 그의 연합 정신이다. 당시 분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국 교회를 위해서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분골쇄신, 불철주야 뛰었다. 둘째는 그의 목회 철학인 복음주의 사역 정신이다. 옳은 일에는 언제나 확실한 표현과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서의 권력의 부조리를 질타한 그의 기도는 국민 위에 올라서는 독재자의 종말이 무엇인가를 정권이 깨달아야 한다는 일침이었다. 그는 또 청년들에게 역사를 아파하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며 격려하곤 했던 용기 있는 ‘큰 목자’였다. 셋째는 교인에 대한 절대 사랑이다. 그 증거의 하나가 그의 탁월한 기억력이다. 심방 때면 온 가족의 이름, 때로는 본인도 기억 못하는 세례 받은 날까지 기억하셨다. 남달리 크고 따뜻했던 그의 손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먼저 축복했다. 목사님은 연세대학교 이사장, 숭실대학교 총장을 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새문안교회 창립96주년(1984.9.23.) 기념예배 축도
장신대학교 부임
장로장립기념(1984.3.13.)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국장 시 기독교계 대표로 강신명 목사가 기도
고-박정희대통령-국장-기독교의식(강신명)1
고-박정희대통령-국장-기독교의식(강신명)2



42. 언더우드 학술강좌



1957년 창립 70주년을 기념하며 교육 위원회의 괄목할 만한 사업과 활동으로 ‘언더우드학술강좌’를 들 수 있다. 이 강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새문안의 자랑이다. 이 ‘언더우드학술강좌’는 매년 교회창립 기념일을 전후하여 개최되었다. ‘언더우드학술강좌’는 교단과 교파를 구분하지 않고 그 분야의 최고 학자를 모셔 새로운 신학의 사조와 경향성을 알리는 수준 높은 학술강좌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언더우드학술강좌 제목과 강사명>

순서

연도

강사명

강좌 제목

1

1957

박형룡 박사

주요한 선생

한경직 목사

김동수 목사

홍이섭 교수

김양선 목사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적 고찰

기독교와 한국문화

선교와 전도

한국의 기독교교육

기독교와 한국근대사

한국성서번역사

2

1958

미확인

 

3

1959

박봉랑 박사

오늘의 한국교회와 신학적 실존

4

1960

한철하 박사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5

1961

David J. Du Plessis

기독교와 농촌사회

6

1962

김정준 박사

위로의 신학

7

1963

이종성 박사

어거스틴의 신학

8

1964

윤성범 박사

윤종성 교수

킹슬레 박사

문동환 박사

현대인의 화해론

대학시대와 가족관계

초월한 신앙

마음에 확장하여

9

1965

김용옥 박사

현대사상과 대결하는 기독교

10

1966

 

강원용 목사

장흥식 선생

김재준 박사

김준영 목사

<교회와 사회>

총론

경제

국제

공동체

11

1967

 

마삼락 박사

이상근 박사

이종성 박사

<미국연합장로교회 67년도 신앙고백서와 한국교회>

미국교회의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종합적인 입장에서

12

1968

 

곽안걸 목사

박봉랑 목사

홍현설 목사

<선교백주년을 향한 한국교회>

역사

신학

윤리

13

1969

노정현 박사

어윤배 박사

70년대를 향한 한국 기독청년의 미래상

70년대를 앞둔 현대 청년의 당면과제

14

1970

미확인

인간화와 교회

‘언더우드학술강좌’는 교단과 교파를 구분하지 않고 그 분야의 최고 학자를 모셔 새로운 신학의 사조와 경향성을 알리는 수준 높은 학술강좌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43. 창립70주년기념 예배당 증축(고딕식 종탑예배당 1957년)



1957년 교회창립70주년기념으로 벽돌예배당을 교회마당에서 2층으로 통하는 옥외계단과 로비를 만들고 3개의 벽돌아치로 지지대를 설치하는 리모델링을 하였다. 설계자는 김중업씨로 당시 개축종탑예배당으로 불렸다. 내부는 강단 전면이 첨두아치 모양에서 현대적 디자인으로 바뀌었고 천장에 샹들리에도 달았고, 하몬드 오르간도 설치하였다.




44. 찬양대의 발전(1950년대)



강신명 목사의 부임 이후 찬양대가 괄목할 만큼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익히 알려진 대로 강 목사는 찬송가를 직접 작사, 작곡할 만큼 교회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분이었으며 둘째, 교회창립 70주년 행사의 하나로 ‘기념음악회’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1957년 7월 6일(토) ‘오라토리오협회’ 주최 성악연주회를 연 후 찬양대가 주체가 되어 9월 29일 창립 기념주일 저녁예배를 ‘창립기념음악예배’로 드렸다. 이날의 기념음악예배는 한인환 집사의 지휘와 백형자 선생의 반주로 교회창립70주년을 상징하는 70명으로 구성된 찬양대원에 의해 매우 성대하고도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강목사의 사회와 김병옥 장로의 기도 그리고 박태준 박사의 특별설교에 이어 성가대의 합창이 있은 후 김혜자, 양옥성 대원의 이중창과 학생성가대의 합창 그리고 이영애 대원의 독창과 곽은수 선생의 오르간 독주가 있었다. 이어서 찬양대의 합창과 변성엽의 독창 그리고 청년회원의 사중창이 있은 후 찬양대의 합창으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70주년 행사를 계기로 그 틀이 확고해진 찬양대는 청년회 이름으로 교회내의 ‘음악강좌’를 개설하고, 외국의 전문적인 음악인을 초빙하여 교회음악에 대한 공개강연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곽상수 지휘자의 지도하에 ‘화성악연구반’이 운영되는 등 전에 없이 활기를 띠었다. 1963년 4월, 찬양대 주최로 대규모의 찬양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 해 4월 15일부터 ‘교회음악의 향연’이라는 주제 하에 오르간 연주회, 칸타타의 밤 그리고 하이든 작곡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연주를 주장돈 지휘 하에 공연했다. 그리고 9월 28일 부활절과 교회창립 75주년을 기념하며 다시 한번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독창과 오르간 연주회가 있었다. 1964년 4월 12일부터 선명회 합창단 지휘자로 있던 장수철 박사가 찬양대 지휘자로 청빙되면서 찬양대가 더욱 발전하였다.

예본찬양대 1969년 성탄절, 부활절



45. 청년대학생회의 활발한 활동



1960년대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인 것이 새문안청년회이다. 당시 ‘청년면려회’ 혹은 ‘새문안 CE The Young Peoples Christian Endeavor Society’ 로 불리었던 새문안청년회의 활동이 이 시기부터 눈에 띠게 활발해졌다. 청년층 선교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강신명 목사의 목회철학과 청년성靑年性이 그 어느 때보다 인정되었던 당시 당회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청년회 활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새문안청년회는 청년회보인 〈새문안 CE〉를 발간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우선 교회 내적으로는 각종 교양강좌와 신학강좌를 개설하였다. 이 때 단골강사로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金亨錫교수가 자주 초빙되어 그의 지도하에 ‘파스칼연구’ 강좌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교양강좌가 청년층은 물론 일반교인들과 교회 밖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자 1965년 초에는 공개청년강좌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강좌제목과 강사진만으로도 새문안의 분위기가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해 6월까지 주일마다 계속된 ‘청년일요강좌’의 강사진과 제목을 보아도 당시 새문안청년회의 앞서가는 성향을 잘 알 수 있다.

일 자

제 목

강 사

1. 24

급변하는 세계와 청년

노정현 장로

1. 31

민족주의

함석헌 선생

2. 7

한국사상의 새로운 모색

신일철 박사

2. 28

기독교 입장에서 본 야당의 정치적 견해

정일형 박사

강좌제목과 강사진만으로도 새문안의 분위기가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해 6월까지 주일마다 계속된 ‘청년일요강좌’의 강사진과 제목을 보아도 당시 새문안청년회의 앞서가는 성향을 잘 알 수 있다.

일 자

주 제

강 사

9. 12

9. 19

한국경제개발 문제

재한 미국인관

주요한 선생

위임스 선생

10. 3

10. 10

10. 17

10. 24

10. 31

준법정신

기독교교육의 기본이념

기독교대학교육의 문제점

기독교중고등교육의 문제점

주일학교교육의 재평가

방순원 장로

원일한 장로

박대선 총장

이창로 장로

김득렬 박사

11. 7

11. 14

11. 21

11. 28

교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

도시교회의 문제점

농촌교회의 문제점

교회와 국가

서남동 목사

박광재 목사

오기형 교수

김준영 목사

12. 5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이규호 박사

새문안청년회는 학술적 모임 외에 교회연합활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즉 안동교회, 연동교회, 묘동교회 그리고 새문안교회 등 4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청년회 연합사업의 하나로 교회연합 배구대회를 개최하였다. 대외적 활동으로는 수양회를 겸한 하계농촌교회 봉사활동과 전도대회를 꼽을 수 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기에 활발한 청년회 활동에 앞장선 청년들은 정충희, 백춘학, 홍미현, 김병권, 이상원, 고응보, 김찬주, 임창우, 김광수, 이용실, 이종희, 방 다니엘 등이었으며 이 시기 청년부부장에는 원일한, 석선진, 노정현, 어윤배 장로, 부감에 박진성 권사, 서기에 이종배 집사, 회계에 이종숙 집사 그리고 교사로 성갑식 목사등이 수고하였다.




1971.12.31

1970

농촌 봉사활동(1969년,원당)

1971 김포 하기농촌봉사



46. 멕시코 선교사 파견(1966년)과 해외선교 지원활동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새문안의 전도활동은 그 폭과 넓이를 훨씬 더해갔다. 이때부터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획기적인 선교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 작업이 남미 멕시코에 우상범(禹相範)선교사를 파송한 일이다. 1966년 7월 17일 저녁예배 시간에 ‘멕시코 선교사 우상범 목사부부 파송예배를 드렸다. 당시 총회 전도부 선교위원장이었던 한경직(韓景職) 목사의 사회와 방지일(方之日) 목사의 설교 그리고 강신명 목사의 축도로 이 날 파송예배가 거행되었다. 1966년말 멕시코시티 남방 200리 근방의 ’구에루나바가시‘에서 대학생 200명에게 전도하여 이들 모두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열매가 있었으며 그 이듬해 1월 멕시코대학생 전도집회에서 100명에게 전도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이렇게 시작된 새문안의 해외선교활동은 이후 더욱 확산되었으니 1968년 6월 김응삼 목사의 대만(臺灣)선교사 파송 때 허봉락 장로를 비롯해 조병린 권사 그리고 여전도회에서 지속적인 선교비를 보조했으며 대만 기릉교회에 찬송가 50부를 보내고 타자기를 김 목사에게 기증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월남에 파병된 백마부대에 매월 전도지를 보냈으며 찬송가와 성경 그리고 기독교 서적을 보내는 등 다양한 국외선교활동을 하였다.



1


47. 새문안동산 조성(1966년)



1963년 1월 제직회에서는 ‘교회묘지선정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가결하고 그 위원으로 방순원, 허봉락, 이봉희 등 3인의 장로를 선정하였다. 이 위원회는 3월 경기도 고양군 벽제에 위치한 임야 38,960평과 대지 1,820평에 이르는 토지를 128만여 원에 구입하였다. 한편 이같이 교회묘지 조성을 위한 토지구입이 이루어지자 교회묘지 조성을 위한 특별부로서 제직회 산하에 산지부 山地部 를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산지부 책임자로 노덕순 장로를 비롯해 허봉락, 김병준, 석선진, 김병옥 장로와 최영규, 박정수 집사 등 7인 위원을 구성하여 이 일을 추진토록 하였다. 그러나 막상 가족묘지를 분양하고자 수차에 걸쳐 광고를 해도 지원자가 없어 부득이 그 해 12월 제직회에서 “교회 산지를 사정에 의해 매각” 하기로 하였다. 그 후 1966년 3월 강신명 목사 명의로 고양군 벽제면 문봉리 산 17-7번지에서 17-9번지 1,998평을 분할하여 ‘사설공원묘지’ 허가를 당국으로부터 받아 오늘의 ‘새문안동산’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첫 묘지 사용은 1968년 12월부터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식목일이면 이곳에 가족을 모신 새문안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도예배를 드리는 또 하나의 새문안 전통이 만들어졌다.



48. 언더우드기념관 (언더우드교육관, 1967년)



교회 창립 8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준비된 이 역사는 1964년 원일한 장로가 그의 소유로 되어 있던 서대문구 교북동 111번지 소재 건물 90평과 그 부속 대지를 교회에 기증하자 이를 매각하여 1964년 말부터 1,000만 원의 예산을 세우는 한편 교인들로부터 건물 위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 예배당 동편에 짓자는 의견이 절대적이었다. 원일한 장로가 기증한 교북동 건물은 ‘애우관(愛友館)으로 불렸으며, 1965년 540만원에 매각하였다. 이후 김대보 장로가 건축위원장을 맡고 위원회에 서재현(徐載賢) 장로와 정주영(鄭住永) 집사를 보강 하는 등 전 교인들이 이 역사(役事)를 적극 추진해 나갔다. 1966년 6월 당회원, 제직회원, 교인들의 헌금으로 1,051만원의 건축헌금이 모였다. 90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연건평 400여 평이 넘는 건물을 새로 짓기에는 건축비용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선 예산 절약을 위해 공사 진행을 교회가 직접 맡기로 하였다. 그래서 기술감독을 제외한 물자구입, 하청계약 일체를 석선진 장로가 맡고, 경리는 정주영 집사, 원자재는 서무부에서 분담해 맡는 등 교회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1967년 7월24일 정초식(定礎式) 예배를 드리고, 80주년 기념일인 9월27일 수요일 찬양예배에 앞서 총 건평 481평의 지상 4층 지하 1층의 아담한 교육관을 개관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 건물을 ‘언더우드홀’(Underwood Hall)로 명명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판(銅板)에 아래 내용을 새겨 넣었다.

이 ‘언더우드 홀’은 한국 선교사이자 교육가이고 이 교회 설립자이자 교인이며 한국인의 벗이고 그리스도의 종이었던 언더우드 일가를 기념하기 위해 봉헌되었다.




49. 다섯 번째 예배당(모더니즘식 예배당, 1972년)



1960년대 중반부터 교인들이 늘어나자 보다 넓은 예배장소와 교육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미 수차에 걸쳐 교회를 신축하며 확장하였지만 교회공간은 교인들의 증가에 따르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건물이 거듭된 증축의 결과로 인해 강관으로 받친 지붕의 안전이 문제되는 등 무리한 역학의 건물이 됨으로 내구연한이 다 지나 신축이 불가피하기도 하였다. 1966년 10월 김병옥 장로를 위원장으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건축위원회는 유명한 건축가 이구, 조자용, 김중업 3인을 지명하여 연합성, 성경적 상징성, 한국적 상징성, 파이프오르간 설치기능 등 4가지 지침을 주고 설계 경선을 실시하였다. 이중 설계안을 제출한 건축가는 이구 씨와 조자용 씨 양인이었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민학 운동가인 조자용 씨는 한옥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살렸고, MIT대 출신으로 황손인 이구 씨는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단순미를 통해 서양식에 한국미를 가미하였다. 건축위원회는 두 설계안을 놓고 여러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회와 좌담회를 거쳐서 이구 씨의 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50. <새문안 85년사> 편찬



<새문안 85년사>의 발간은 1971년 편찬위원장을 맡은 노정현 장로를 중심으로 온 교우들이 자료수집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김종렬 전도사도 봉사하였다. 집필 책임자로는 한국 교회사가(敎會史家)로서 널리 알려진 연세대 신과대학의 민경배(閔庚培) 교수가 선정되어 수고하였다. 민교수는 단순히 새문안만의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써 대표되는 한국교회사 전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각에서 집필에 임하였다. 1973년 4월 <새문안 85년사>가 발간되었는데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새문안의 특징은

1. 새문안교회는 총화(總和) 아니면 조화와 일치의 화해적(和解的) 자세로 일관하여 왔다.
2. 새문안교회는 두 극단(極端)을 항상 온건과 미려(美麗)로 상쇄시켜 왔다.





51. 남선교회와 여전도회의 활동



197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와 대상은 매우 다양해지고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교세가 커진 것이다. 본래 남선교회는 1920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청년면려회’(면려회)로 불리다가 1963년 8월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장년면려회 전국연합회 총회에서 그 명칭을 ‘평신도회’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77년 제62회 교단총회에서 ‘남전도회’로 변경되었고, 다시 1979년 9월 총회에서 ‘남선교회’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문안 남선교회는 총회 차원의 면려회가 결성되기 이전인 1921년 4월 남녀회원 31명으로 조직된 후 1923년 학생면려회와 청년면려회로 분리되어 활동하다가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자 고응진, 정충희, 백춘학, 김병권, 민종식 등 청년 집사들을 중심으로 새문안 청년면려회를 재결성하였다. 1957년 새문안 면려회는 청장년면려회와 고등면려회, 중등면려회, 소년단으로 분리 발전되었으며, 이후 총회 결의에 따라 청장년면려회는 평신도회, 남전도회 그리고 다시 평신도회로 명칭은 바뀌었으나 그 활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활발해져갔다. 1950~1960년대 전도활동과 농촌계몽 및 의료, 봉사활동을 여전도회와 함께 역동적으로 추진했다. 1970년대 교회선교부와 남선교회, 여전도회에서는 무려 81개 교회에 지원을 하였다. 1970년대 여전도회의 전도활동은 눈부셨다. 교회 창립 시기부터 전도와 이웃을 위한 사랑의 봉사활동을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헌신봉사 하였다.


1950년대 남선교 회원들과 여전도 회원들


<여전도회 회장명단>

1963~4

1965

1966

1967~8

1969~70

1971~2

1973

1974~5

1976~7

1978~9

1980

조병린

박봉호

이마리아

김수길

이혜생

우관실

양순화

김명진

김홍련

박병숙

이향란




52. 김동익(金東益) 목사(1941~1998)



김동익 목사는 1941년 10월 1일 경남 하동읍에서 김희용(金熙用) 목사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목사 가정은 일찍이 개화된 가문으로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신앙의 뿌리가 깊은 목회자 가문이었다. 1960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하였다. 김 목사는 대학 재학시절 4년간 새문안교회에 출석하였는데 1961년 5월 어느 날 하숙방에서 강신명 목사의 심방을 받았다. 대학졸업 후 ROTC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김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1970년 2월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1972년 서울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끝내고 밴더빌트 대학원에 진학하여 목회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6년초 귀국하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는데, 그해 6월 포항제일교회의 청빙을 받아 5년동안 시무하며 그 교회를 부흥발전 시키던 중 새문안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 1981년 4월 22일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 목사의 설교는 복음적이며 대중적이라는 평을 받았고 목회철학과 목회방법은 전 교인들을 끌어안는 폭넓은 포용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 교역자는 물론 일반 교인들과도 늘 횡적인 관계 속에서 교회행정을 처리하는 민주적인 자세로 목회에 임했다. 김 목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였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닮아가도록 성장해야한다.
둘째, 교회는 선교이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운영은 선교체계화 되어야하고 선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역사적 특징을 발전시키고 계승하며 이를 선교의 자원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새문안교회는 몇 가지 자랑스러운 특징을 갖고 있다.
  • (1) 역사성이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역사가 길다는 뜻만이 아니라 역사발전에 책임의식을 갖는다는 의미 도 내포되어 있다. 새문안은 오랜 역사에 걸쳐 축적된 신앙과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한편 민족 의 염원과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2) 도심성이다
    새문안은 수도 서울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 도심은 새로운 문화를 흡입하고 재창출하는 기능 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새문안은 한국에서 기독교문화 창출에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
    (3) 연합성이다
    새문안은 지난 100년 동안 지역과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숱한 신앙사조의 소용돌이가 있었지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연합과 포용정신을 가지면서 한국교회의 맥락을 지켜온 중심 교회이다. 새문안은 한국 교회의 어머니교회로서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에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세계 선교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
김동익 목사 부임 후 눈에 띠게 달라진 것은 전에 없이 교인수가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새로 부임한 김동익 목사의 선교 열정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53.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1987년)



1. 선교사업
언더우드 목사와 알렌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의 라피엣교회의 교세가 매우 빈약해져서 100 주년 기념사업으로 3년간 매년 선교지원금으로 미화5,000달러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태국에 태국선교를 위해서 조준형 목사를 파송하였고, 국내 두 곳에 개척교회를 세 우는 역사(役事)를 해냈다. 그것은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외딴섬, 전라남도 진도의 ‘새진도교회’(위계조 목사) 와 기현두 목사가 시무하는 서울 상계동의 ‘새온교회’였다.

2. 역사편찬사업
<새문안교회 100년사> 발간에 앞서 <새문안교회 문헌사료집>과 <사진으로 본 새문안 100년>을 1987년 9월과 1989년 4월에 각각 발간하였다.

3. 새문안수양관 설립사업
100주년을 기념하며 교회 내적으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으로 가평군 하면 신상리에 총면적 20,702평에 달하는 수양관 부지가 마련되었다.

4. 새문안경로원 설립

5. 새문안교회 시민도서관 설립

6. 교회건물의 시설 보수사업














54. 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사업(2007년)



1. 교회사료관 이전 개관
2003년 4월 언더우드 기념관 지하에 교회사료관을 개관하였으나 공간이 협소하여 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사업으로 언더우드 기념관 3층에 장소를 확장하여 재개관 하였다.

2. 새문안 언더우드 선교훈련원 설립
세계 선교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를 발굴, 교육하여 선교지에서 선 교사와 동역 혹은 독자적인 선교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목적으 로 설립하였다.

3. 새문안교사교육원 설립
전국 교회학교 교사 및 교회학교 지도자를 대상으로 설립하였다.

교회사료관-상설전시관(언더우드기념관-3층)
4. 120주년 기념예배 및 언더우드 선교사 추모예식
기념예배는 9월 23일(주일) 오후 3시에 본당에서 있었는데, 이수영 담임목사가 인도하고 총회장 이광선 목사가 설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인 김중은 목사가 축사, 서울노회장 인 이성희 목사가 축도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 합동 추모예식은 11월 4일(주일) 오후 3시에 양화진 묘역에서 언더우드 목사 설립 교회 중심으로 가졌다.

120주년마당행사
5. 언더우드 설립 자매교회 방문 및 초청예배

교회명

시흥교회

김포제일교회

서교동교회

능곡교회

양평동교회

신사동교회

방문

610

715

819

3월 18일

415

527

초청

1017

1010

1128

1031

1121

125

양평동교회
김포제일교회
시흥교회
서교동교회
능곡교회
신사동교회
6. 120주년 기념경축 음악회
새문안 가족음악회(9월 12일), 새문안 솔리스트 음악회(9월 19일), 기념음악예배(9월 23일, 하나찬양대합창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7. 맹인 120명에게 개안 수술비지원
교회 창립 120주년을 맞아 맹인 120명에게 새생명의 빛을 찾아줄 수 있도록 실로암안과 병원에 개안 수술비를 지원하였다.

8. 120주년 기념우표, 기념사진첩(CD제작)

9. 120주년 기념 동화집 출간
신앙을 바탕으로 한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이며 글은 이희갑 재적장로가 삽화 는 화가 하민수 집사가 내용에 맞게 제작하였다.

10. ‘원두우(元杜尤), 그 섭리(攝理)의 발자취’ 발간
교회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며 하나님 섭리에 따른 언더우드 목사의 한국 선교 발자취 를 돌아보기 위해 자료집을 출간하였다.


120주년기념동화책 바람이 말할때 들어보세요표지
120주년기념 원두우, 그 섭리의 발자취 표지



120주년 마당행사 및 기념사진

120주년 기념예배
시각장애 아동을 위해 기도하는 김선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