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연합신문 [ 2004.6.10 ] 기사
작성자 사료관()
등록일자 2005-10-21 오후 3: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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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새문안교회’

한국 장로교회의 어머니교회로 첫 세례식도 거행



1904년 송순면 장로장립 더불어 공식 당회 조직

독립운동가 김규식, 계몽운동가 안창호 등 배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직을 구성한 교회로 알려져 있는 새문안교회.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 방향 신문로에 위치하고 있는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목사) 는 1887년 9월27일 문을 연 최초의 조직교회이며, 한국 장로교회의 어머니 교회다. 서상륜이 전도한 서울 신자 등 14명이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 선교사와 함께 언더우드목사의 사랑방 에서 1887년 9월27일 모였는데, 이날 밤 3명의 한국인이 선교사들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2명 의 장로가 선출됐다. 이후 주일예배는 언더우드선교사 사저의 사랑채에서 정기적으로 있었 다.
새문안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일들이 많았다. 그 일들 중 에는 1887년 10월2일 장로 안수식이 열렸고, 같은 해 12월 크리스마스에는 성찬식이, 그리고 1888년에는 세례식(11명)을 거행했다. 나아가 1904년 10월에는 송순면장로의 장립과 더불 어 공식적인 당회가 조직되어 지금까지 정기적인 모임을 하고있다. 당회가 조직된 최초의 교 회였던 것이다.
1916년 언더우드목사의 별세로 E.W. 쿤스선교사가 뒤를 이었고 1920년 11월 차재명목사가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당회장 목사가 되었다. 차재명목사는 1900년 새문안의 조사로 활동하다가 1912년 장로가 되었다. 교회의 후원으로 191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부터 1941년까지 20년간 일제의 형극의 시대를 믿음으로 이겨내면서 새문 안의 강단을 지킨 인물이다. 차목사는 1924년 예수교연합 총회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1929년 장로회 제18회 총회장을 지내며 일제하 한국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새문 안교회 안에 세워져있는 언더우드목사의 기념비는 일제하 암울했던 새문안교회, 아니 한국교 회 초기 역사의 아픔을 안고있다. 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언더우드목사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1 927년 9월21일 교회 앞뜰에 비를 세웠다. 하지만 1941년 2월 일제는 한국내의 미국인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고, 그 일환으로 언더우드목사의 기념비도 철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새문안 교회는 이 비를 교회 밖으로 철수하지 않은 채 교회 한 구석에 보관했다가 해방 후 지금의 자 리에 세웠다. 이러한 시대적 아픔을 이겨낸 이후 사회와의 관계에서 융합적 선교자세를 지향 해온 새문안교회의 당회장으로는 김영주 최화정 강태국 강신명 김동익 목사등이 거쳐갔다. < br> 새문안교회는 1895년 여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교회 신도들은 의료선교사를 협력 환 자들의 간호와 구호활동을 벌였다. 새문안 교인들의 고아와 소외된 이웃들을 향한 섬김과 나 눔의 예수 사랑실천의 정신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새문안교회의 이러한 초창기 정신은 3.1 만세운동과 군사독재 시절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앞서서는 것으로 이어졌다.
교회의 성장을 거듭해오던 새문안교회에는 1910년대에 들어서 홍제동, 한강, 교북동, 김포, 행주, 동막, 파주 등 7개 지역에 예배처를 두었다. 지금은 지예배처 모두가 독립교회로 성장해 있다.
교회 설립자인 언더우드목사는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왔다. 미국 장로교회의 파송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는 처음 얼마동안은 목사라는 신분을 숨기면서, 알렌선교사가 세운 광혜원 일을 협력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기독교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도 병원과 학교 등에서 간접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말을 조금씩 배워가던 언더우드선교사는 1886년 5월 자신의 집에 영국 고아학교 형태 의 ‘예수교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예수교학당에서는 학비 와 옷가지, 음식을 모두 제공했다. 원생 한명으로 시작한 예수교학당(후에 ‘구세학교’와 ‘경신 학교’로 바뀜)두달만에 원생이 10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연유 등으로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 연스럽게 교회당 창립을 서두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교회 성격이 강했던 새문안교회는 교회의 위치 때문에 초창기에는 ‘장로교 정동교회’, ‘정 동예배당’ 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지금의 교회명은 1894년 예배당을 서대문 안쪽 대로변 으로 옮긴후 붙여진 것이다.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발자취를 되돌아 볼수 있는 각 분야의 일꾼들을 양육해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던 어린 김규식을 성장시켜 독립운동 가로 키워냈으며, 우리나라 대표적 구국계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한글학자 최현배, 음악가 홍난파 등을 배출했다.